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바오로 2세 (문단 편집) === [[1984년]] 방한 === [youtube(7yE1SkxCxMI)] [[한국]]을 두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이용한 항공사는 [[알리탈리아]]로, 기종은 [[DC-10]]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도 알리탈리아를 이용해 [[서울공항]]으로 입국하였다. 천주교 전래 200주년 및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대목구]] 설정(1831년 9월 9일) 150주년을 기념해 1984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조선]]시대의 [[한국 103위 순교성인|순교복자 103위]]를 시성하였다. 군사독재 시기인 1984년의 방한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당시 [[전두환]] 정권이 소위 유화조치를 취하게 만든 계기 중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 [[파일:attachment/요한 바오로 2세/04.jpg|width=100%]] || ||<:> 교황의 한국 방문 당시 [[전두환|전두환 대통령]]과 접견하는 사진 || 정통성이 부족한 [[전두환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교황 방한을 적극 추진했으나, 자칫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고민에 [[교황청]]은 망설였다. 한편 교황 방한 직전인 [[1983년]] 12월 유화조치가 취해진다. 대학구내에 상주하던 전투경찰병력 철수, 민주화운동관련 제적학생 복교, 해직교수 복직, 일부 정치범 석방, 몇몇 민주인사 정치활동금지해제 등 일명 [[1984년]] 유화국면의 도래이다. 전두환 정권의 이 유화적인 태도는 정권의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반독재민주화세력의 씨를 말렸기 때문에 약간 풀어줘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는 것. 이 시절은 박정희 정권 말기를 기점으로 부흥했던 대규모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70년대 저리가라 할 정도의 초강경 진압으로 큰 침체기였던 시절이다. 한편으론 반대 의견도 있다. 전두환 정권이 폭력을 기반으로 세운 정권에 대한 대외적인 평가를 바꿔보기 위해 교황의 방한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적극적인 자세이라기보다는 교황 방한의 역효과를 우려하여 여러 차례 방침을 번복했던 것도 사실이고, [[교황청]]은 이미 1980년 당시부터 [[5.18 민주화운동|광주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면서 교황의 한국 방문을 적극 추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1984년 한국 방문 당시 대표적으로 한 말이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논어]]》 학이(學而) 편의 구절이었다. 나무위키에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이 부분이 1989년 방한 때 했던 말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이는 1984년 방한 때 했던 말이다.[[https://youtu.be/AZe5uFu_gVU?t=158|#1]] [[https://www.pa.go.kr/portal/contents/stroll/special/view.do?bd_seq=20|#2]]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910462|#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